70년된 집의 변신! 고풍적인 느낌과 모던함의 콜라보. 젊은 부모님의 귀농일기 시작.









우리가족에게 2014년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일을 꼽으라면 역시, 부모님의 귀농생활 시작이 되시겠다. 
원래라면 2년 뒤에(동생과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는) 했어야 할 고향살이를 조금 서두르게 된데에는  이유가 있다. 올해 초, 해양경찰이셨던 아버지는 지병으로 몇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다. 몸을 추스르기 무섭게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해양경찰 폐지', 공무원 연금 삭감 등 여러 조건이 맞물리는 상황에 맞닥뜨려졌고, 결국 아버지는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경찰직에서 물러나 명예퇴직 하셨다. 건강을 위해서 시골로 내려가기로 결정을 내리셨지만, 사실 귀농은 두 분의 오랜 꿈이셨다. 20년넘게 몸 담던 직장을 벗어나신 아버지를 포함해 인생의 작은 목표에 도달하신 두분의 요즘 심정은 어떠실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간 이런저런 인테리어 소품을 구하고 만들어 오신 어머니께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리는 과정이 스트레스와 동시에 적지 않은 즐거움도 얻으셨을것 같기도하다.





<귀농 전과 후의 부모님>








 새 집터인 장소는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자 바로 작년까지 친할머니께서 살고 계셨던 친가댁이다. 지난 해, 할머니께서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고, 그 집에서 살기로 결정하신 부모님께서는 집 틀을 거의 보존한 채 새로운 집을 짓기로 결심하셨다. 실제로 매해 명절은 물론, 한번 씩 찾아갔던 시골집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는 기대한 지 어언 반년. 작년 11월에 부모님은 드디어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이삿짐을 나르는데 내 우유트럭이 한 몫 했다는건 사장님껜 비밀.
 이삿짐을 옮기면서 보았을 때, 아직 집은 할머니께서 사셨던 옛 집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후 기말고사, 계절학기 등의 바쁜 척으로 두 달여만인 최근에야 고창 집에 찾아갔다. 내가 정신 없던 그 사이, 우리 집은 리빙매거진 'lemontree' 와 'SBS 생방송 투데이' 에서 취재 후 여기저기 알려진 상태였다.( 레몬트리 잡지기사와 , 생방송 투데이 방송분은 게시글 하단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군산 집 인테리어 소품1>






군산(이사 전)에서 살았을때도 어머니의 인테리어 솜씨는 대단하셨다. 어릴적 기억 중 하나를 얘기해보자면,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는 동생과 나의 친구가 우리집에 오는 것을 조금 불편해 하셨는데, 이유는 동생과 나는 인테리어 소품에 익숙해져서 별 감흥이 없지만 나와 동생의 친구들은 소품을 신기해하며 만지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소품에 관해 가히 코난 같은 추리력을 지니고 있으셨는데, 집에 없을 때 찾아온 친구들의 작은 터치도 알아차려 내 친구가 왔는지 안왔는지를 판별 하실 정도였다. 그 이후론 내 친구들이 집에 찾아 왔을 때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건들지 않기로 약속을 받고 나서야 문을 열어주곤 했다. 어릴 적 수없이 거쳐갔던 방문 학습지 선생님들도 다들 어머니의 인테리어 솜씨에 칭찬일색이셨다. 만드는 솜씨가 타고난 어머니는 퀼트와 프랑스 자수, 최근에는 평생 꿈이셨던 미술까지 도전하셔서 각 분야의 전시회에 여러 차례 전시품을 내걸었다. 집에 있는 인테리어 소품들은 산 것도 있겠지만 어머니 스스로 만드신 게 더 많다. 어머니께서 컴퓨터를 다룰 줄 아셔서 블로그를 운영했다면 아마 자신의 능력을 맘껏 자랑하는 파워블로거가 되고도 남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맛보기로 사진 몇 장 안올리지만 언제 한번 기회 잡아서 엄마의 취미에 대해 블로그 포스팅 한 번 해봐야 겠다.








<군산 집 인테리어 소품2>







  


<어머니의 프랑스 자수>











<어머니의 그림>







어머니는 새집 짓기를 시작하면서 현장에 같이 머물며 당신이 어떤 식으로 가구와 인테리어를 배치할지 계획하고 계산하셨다. 군산 집에 오랜만에 찾아갈때면 집이 어떤 식으로 바뀌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집을 꾸밀 것인지 얘기를 늘어놓느라 분주하곤 하셨다. 아버지도 계획을 말씀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영향력은 어머니쪽이 더 컸지만 말이다. 두 분은 마당에 어떤 나무를 심을지, 울타리는 어떻게 할지 등의 생각을 말씀하시고 동생과 나에게도 종종 의견을 구하셨다. 나는 석류나무를 심어달라고 얘기했던게 기억난다. 두 분 모두 행복해보였다.










<건축 전의 시골집>



 



 자, 내가 어릴적 방아깨비를 잡고 눈뭉치를 굴리며 뛰어놀던 시골집은 어떻게 변했을까?





고창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께서 장작을 부지런히 패고 계시다가 나를 반겼다. 집을 처음 보았을때 가장 먼저 눈에 확 들어온 것은 탁 트인 마당이었다. 원래의 시골집은 담벽으로 막아놓아 답답한 느낌이 있었다면 새 집의 마당은 기왓장으로 낮은 울타리를 만들어 탁 트이고 집 마당을 훨씬 넓어보이게 만들었다. 담장을 기왓장으로 만들자는건 부모님의 아이디어였다. 지난 겨울동안 이 기왓장들을 두분이서 하나하나 쌓느라 애 좀 먹으셨단다. 그래도 결과물을 보니 정말 깔끔하고 집과 잘 어울리는것 같다. 색감 짙은 마루와 나무장작, 절구통과 항아리들이 운치를 더했다. 내부 뿐만이 아니라 외부도 신경썼음을 곳곳에서 발견 할 수 있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는 물론, 별채도 따로 있어 두분이 사시기에 공간이 넉넉했다. 미래에 결혼한 동생과 내가 각각 가족단위로 찾아온다 해도 끄떡없게 계획하신건진 잘 모르겠으나 후에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생각했다.(혹시 숙박업을 염두해 두셨나?) 마당에서 어머니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셨다. 먼저 마루를 통과해 안채로 들어섰다. 역시나 평범하지 않은 평면TV와 어머니의 십자수, 고풍스럽고 알록달록한 서랍장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장작,고구마와 함께 놓인 화로. 그리고 나무로 된 시계와 원래 나무 상태를 최대한 보존한 스탠드 옷걸이에서 두 분의 인테리어 센스가 압력밥솥의 증기마냥 뿜어져 나왔다. 













1시간 남짓 운전을 하여 온 고창이라 화장실이 급했던 나는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배설의 욕구를 상실했다. 화장실마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놋그릇의 대야가 그러했고 놋그릇과 맞춘듯한 짙은 놋색 비슷한 샤워기가 그러했다. 조명도 세면대도 평범하게 보아오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평범하지 않은건 내 안에서 제조하여 막 세상에 나온 작은 아이들 뿐이었다. 





 




안쪽으로 이어진 리빙룸이 우리집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자주 있을 수 밖에 없는 부엌과 이어진 리빙룸은 문여사의 손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느낌표 한두개만으론 그곳의 느낌을 다 표현하기에 모자랐다. 화이트계열의 색감으로 깔끔하고 모던함을 준 싱크대와 벽. 고동색의 나무틀이 단조로움을 피하게 만들었고 나무로 된 식탁과 의자가 이에 멋스러움을 더했다. 예전 시골집에서 사용하던 아궁이를 그대로 보존하여 옛스러움과 모던함이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이외에도 적절한 조명의 위치,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에서 과연 취재가 올만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을 방문한 날에도 한 신혼 부부가 집을 방문해 인테리어를 구경하고 갔다고했다. 지금까지 여러사람들이 와서 집을 구경했다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콧대가 성형없이 높아져 있었다. 













리빙룸 뒤쪽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있기에 문을 열어봤다. 테라스와 함께 아직은 겨울이라 벌거숭이인 뒤뜰이 보였다. 추운 요즘에는 외면받을지 모르겠으나, 날이 따뜻해지면 부모님 두분이 이 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엔 황토색보다 초록색이 더 보이며, 어머니 아버지의 땀이 어린 무언가들이 테라스의 그림 밑바탕이 되어주겠지. 벌써부터 저만치에서 땀 뻘뻘 흘리며 작업하고있을 내 모습도 보인다. 찬바람 들어온다는 어머님의 말씀에 조용히 들어왔다.










사랑채는 어머니의 작업실이다. 바느질이며 십자수, 미술의 결과물을 이곳에서 완성한다. 이미 곳곳에서 자수와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의 흐트러짐이나 나무의자가 반쯤 나와있는 부분 모두 어머니의 평범을 벗어나려는 컨셉이 아닐까 싶다. 별관은 아직 두분도 잘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문여사의 표식을 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저녁 식사시간. 다이어리 정리하던 나는 가족이 모두 주방에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싶어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나를 제외하곤 모두 분주하다. 오늘의 메인메뉴는 토란요리와 갈비찜, 조기구이다. 이 얼마나 그리웠던 어머니표 밥상인지 ㅠ 자취생인 나에게 제대로 힐링된 시간이었다. 맛이 기가막혔기에 한그릇만으론 내 위장에게도 어머니 마음에도 예의가 아니었다. 후식으로 먹은 호박고구마와 물김치는 환상이었다!


















먹는 얘기가 나와서 마저 올리자면, 고창이 고인돌, 선운산으로도 유명하지만  풍천'장어'님으로도 유명하다. 오랜만에 고창에 내려온 나와 동생을 위해 다음날 점심 부모님은 맛이 기가막힌 곳이 있다하여 선운산근처에 위치한 장어집에 갔다. 



동생 핸드폰 사진이 좀더 색감이 좋은데 뭔가 음식 조형물 같기도하다.








풍천장어를 한입에 넣었다. 첫 입은 장어 맛 그대로를 느끼기위해 쌈을 싸지 않았다.

풍천장어 맛이 입안에서 폭발한다. 오랜만에 느끼는 장어살의 담백함과 달짝찌근하면서 짭쪼롬한 양념이 혀 양쪽을 꽉 잡고는 비틀어 쥐어짜는것 같았다. 혀의 진동모드가 시작된다.


맛집 블로깅을 하려던게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쓰겠다. 참고로 이곳은 고창 빛고을 풍천장어집인데, 선운산 입구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다음에 시간될때 제대로 포스팅해 올릴 예정이다.


기승전장어라니! 미안하다..  엉엉










고창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이틀을 푹 쉬고 삼일 째 되는날 전주에 돌아왔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좁디 좁은 자취방에 가야만 하던 일을 마저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틀동안은 아무 걱정 없이 푹 쉬다가 왔다. 매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이렇게 좋을수가! 집 안에 먹을것이 이리 풍족하다니! 역시 집이 최고다. 

인생을 몇 단계로 나누어 본다면 우리 부모님은 큰 굴곡을 통과한 직후가 아닐까 싶다. 취업의 장벽에 다다른 나에게 두분의 평탄할 노후는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지금의 부모님이 계시는데 있었을 수많은 굴곡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란!) 더해줬음 더해줬지 못한것 하나 없이 훌륭한 부모셨던 두 분. 지금처럼 앞으로도 큰 굴곡없이 알콩달콩하게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새로운 보금자리가 두 분에게 그리고 나와 동생에게도 몸과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우리가족을 똘똘 뭉칠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가오는 설연휴. 뜨뜻한 아랫목과 호박고구마, 귤. 제때 차려지는 밥상의 기회가 코앞에! 또다시 그곳에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온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다. 모두 즐거운 설 연휴되길 바란다.         






끝으로 리빙 웹 매거진 lemontree에 실린 기사와 생방송투데이 동영상을 남긴다.

생방송 투데이에서의 아버지는 어.색.함 세글자로 완전무장하여 보는이로 하게끔 예능적인 요소까지 느껴지게 만드셨다. 아들인 나는 차마 눈을 다 뜨진 못하고 반만 뜬채 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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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에서 제공하는 2분 클립영상 









영상 캡쳐화면을 몇장 올리겠습니다.




사진 및 영상자료 출처 : 리빙 웹 매거진 레몬트리 ( lemontree.co.kr ) , SBS 생방송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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