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 우유 나눠드립니다! 자취생이 전하는 우유 나눔 에피소드.






춥디 추웠던 겨울이 다가는 이 시점에서 지난 9월에 썼던 포스팅 '[썰]오늘도 우유배달은 평화롭습니다' 을 다시 한번 읽어보니, 그래도 '저때는 춥지라도 않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12월은 초반부터 눈이 절대 아쉽지 않도록 쏟아졌고, 눈 쌓인 비탈길은 내 배달용 1톤 트럭에게 개미지옥과 같았기 때문이다. 학교로 우유배달을 하는 알바 특성상 학교가 쉬면 우유 배달도 쉬게된다. 그 말인즉슨, 지난 1월, 2월동안은 알바 없이 편하게 쉬었다는 것.(물론, 초·중학교 겨울방학과 봄방학 사이 2주간은 일을 했다.) 학기 중에는 주로 중·고등학교에 배달하는 나로써는 2주동안의 초등학교 배달은 그 나름대로 고충과 향수가 있었다. 그에 관한건 다음 번에 포스팅 하기로 하고 오늘 포스팅 주제는 그간 묵혀놓았던 '우유 나눔' 에 관한 것이다.



포스팅 글 '[썰] 우유배달 알바생의 소소한(?) 에피소드' 의 메인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유배달을 하다보면 많은 우유들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우유 배달 하면서 먹으라며 사장님께서 챙겨주시는 우유도 있지만, 학생들이 먹지 않고 남기는 우유를 수거하여 챙겨오는 것이 대다수이다. 이미 한번 배달갔다가 먹지 않은 상태로 수거해 온 우유는 사장님 말마따나 상품으로써의 가치는 잃었으며 날씨도 춥고 하니 상하지는 않았을 터, 내가 마음대로 가져가도 좋다는 것이 사장님의 말씀이셨다.

 



흔한 우유 알바생의 냉장고




먹지 않을거면 우유를 왜 시키냐는 말도 여럿 있겠지만 , 학교별로 우유를 주문하는 시스템이 다르기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다고 본다. 어떤 학교는 흰우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먹고 싶은 종류의 우유를 매일같이 주문 할 수 있게 해준 반면에, 또다른 학교는 화,목요일은 흰우유만 주문가능하며 나머지 요일은 자기가 먹고싶은 우유를 먹을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몇몇 학생들이 화,목요일의 흰우유를 대수롭지 않게 포기하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물론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그러므로 수,금 요일은 내가 흰우유 폭탄을 맞는 날이다. 가끔가다 건지는 다른 맛의 우유들은 '우유박스 속 숨은 우유찾기'라는 나만의 오락을 탄생시켰다. 그것도 새벽, 아무도 없는 학교 복도에서.  




사과 자리를 꿰찬 우유님들



   


내 자그마한 자취방 냉장고가 날로 쌓이는 우유들을 버틸 재간이나 있을까? 위의 사진처럼 사과도 내쫓고 반찬도 내쫓으며 점점 우유들은 영역을 넓혀갔고, 나 혼자서 이것들을 한 두팩씩 먹워치워봐야 끝이 없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몇개씩 나눠주거나, 길가에서 만난 종이박스 모으시는 어르신들 혹은 부모를 동반한 아이들에게 우유를 나눠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녀석들은 유제품이다. 유통기한이란것이 존재하며 그 또한 길지 않다. 그 때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으니, 지난 여름 원룸 주인 부부께서 텃밭에 직접 가꾸신 상추를 세입자들을 위해 나눔 해주셨던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호라~ '우유 나눔' 을 해보자꾸나






우유 나눔. 덩그러니 우유만 놓기엔 뭔가 아니다 싶어.. 


어느 단체나 장소에 우유를 나눔하기엔 우유 양이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정기적으로 우유를 공급할 수 있음을 확신 할 수도 없기에 가까운데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옆집 윗집 따닥따닥 붙어있는 자취원룸 이웃사촌들에게 나눠보기로 한 것이다. 눈도 내리는 판국에 원룸 1층 현관에 냉장고 없이 우유를 놓았다 해서 쉽게 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현관에 우유를 놓기만 하면 과연 이웃들이 가져가기는 커녕 관심을 보이기나 할까 싶었던 것이다. 나라도 다른사람 것이겠거니 싶거나 유통기한 등 의심스러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을것 같으니 말이다. 하여, 우유 박스를 만들기로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주변 자재들을 이용해 투박한 우유 상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상황을 써넣고, 굴러다니는 종이박스와 우드락으로 각각 우유보관 상자와 팻말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독 없습니다. 맘껏 드세요.



     완성!




만들고 나니 어느덧 새벽. 잽싸게 1층 현관으로 내려가 잘 보이는 위치에 우유 박스를 배치했다.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것이, 마치 내가 연인에게 해주는 이벤트 준비의 그 설렘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우유배달 후 돌아왔을 때 몇개나 우유가 사라져있을지 기대됐다. 







결과적으로 그 날 당일 오전 우유배달을 마치고 돌아왔을때부터 우유 2~3개씩 누군가 가져가는 것 같더니, 매번 우유박스 안을 확인할때마다 우유의 수는 줄어 있었다. 누군가는 내가 조금 들인 공으로 어쩌면 허전했을 아침 속을 달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우유 공급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유제품 특성상 일정 시간대를 정해 남은 우유를 수거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다시 다음날 새벽에 진열하고, 비워진 우유 자리는 새로 채우고 를 반복했다. 우유 줄어드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우유박스 한 개로는 안되겠다 싶어 작은 스티로폼 상자를 이용해 우유 공급에 박차를 가했다.  





가끔은 여러가지 맛의 우유로 부지런한 누군가는 잭팟!



이번달 이웃들의 씨리얼 소비량은 늘었을라나?

 


나름 혼자 상상해보았다. 자취를 하면서 왠만한 아침은 거르게 되는 요즘, 출근 혹은 등교길에 우유 한 팩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속이 조금 든든하지 않을까? 우유가 배치되 있으니 씨리얼 종류를 구비해놓는 세입자도 있지 않을까? 우유를 잘 안먹어왔던 세입자는 부담없이 우유를 접할 수 있을 테고, 더 나아가 초등학교 시절 마시던 우유에 대한 추억도...오버 한다 또. 


우유는 다행히도 마르지 않았다. 매주 수,금요일마다 필요 이상으로 재충전됐으며 알바 가는 길에 우유 몇 팩 꼽아 넣는것 또한 조금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상황이야 어떻게 되었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선에서 타인을 위해 행동하고 있음이 오히려 나의 생활에 활력을 주는 느낌이었다.




나눔으로 생겨난 소소한 에피소드들.



1.

우유나눔을 하고 있다보니, 이상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지나가다 만나는 이웃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 아주 작은 용기가 솟아오른것이다. 당신은 나를 모르지만 어쩌면 당신의 위장은 내 미덕을 알고 있을것이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그 이유였다. 물론 '내가 우유나눔 하는 그사람이오!' 라는 말은 조금도 하지않았다. 덕분에 '이사람 뭐야?' 하는 표정의 몇몇 이웃들도 한 두번 인사가 오가자 낯설음 없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였다.(아직도 비정상인으로 나를 보는듯한 표정은 더러 있다.) 나름 큰 쾌거라 할 수 있었다.


2.

우유나눔이 계속되던 어느날, 한번은 서울로 해외봉사 면접을 볼 일이 있어 헐레벌떡 집을 나서는데 원룸 주인아주머니께서 날 붙잡으셨다. 너무 급했던터라 사정을 말씀드리며 다시 연락 드리겠다고 말씀드린 후 서울로 가서 일을 보는데 아래와 같은 문자가 날라왔다. 매일 아침 현관 한쪽에 놓여있는 우유에 대한 불신을 깔끔하게 쓸어버릴 문자였다. 더불어서 이 날 이후로 원룸 주인 두 부부에게 이쁨(?) 받는 세입자가 된 나. 후에 다른 세입자들보다 먼저 싱크대와 신발장을 새 것으로 교환 받을 수 있었다는 잿밥은 좀 더 나중 일이다.



  

마음이 열린 주인집 부부를 만나 정말 다행이다.



3.

한번은 우유 박스안에 이런 것이 들어있기도 했다. 아무런 메세지 없이 덩그러니 들어있기에 처음에는 누군가 잠시 놓고 간 물건이구나 싶어 그대로 두었는데, 하루가 지나도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나에게 주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일단 찾아왔다. 물론 내가 가지고있음을 표시해 둔 채. 내게 준 것이란 확신이 없어 뜯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물컹물컹한 요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우유로 만든 치즈인가? 어찌됐든 이 물건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채 아직까지 우리집 냉장고 안에있다.(사실 겁나서 못 뜯어보겠다.)  만약 누군가 감사의 표시로 준 것이라면 이 포스팅을 빌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싶다 


요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지금은 한동안 우유배달을 쉬고있어 우유나눔은 멈췄다. 이제 며칠 있으면 학기 시작과 동시에 다시 우유배달 생활이 시작된다. 앞으로도 크게 더워지지 않는 이상은 우유나눔을 계속 할 생각이다. 우유 나눔이 이웃들 간에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고는 절대 말 못하겠다. 그저 따닥따닥 붙어 삭막하다면 삭막한 이 원룸촌 어딘가에는 상온의 우유마냥 빠르게 상해버리지만은 않는 무언가를 위해 현재에도 골똘히 생각 또 생각하는 세입자들과 주인집 부부가 있다는것에 만족한다. 




덧, 제가 우유를 남들에게 베풀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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