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 우유배달 알바생의 다사다난 학교 우유배달 에피소드.
"지금 어디야? B병원 앞으로 바로 와." 사장님이셨다.
혹시 다른 배달아저씨가 펑크 혹은 차량사고를 내셨나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무슨 일이냐고 여쭤보니 다행히도 같이 아침 먹고 마저 하자신다. 12월 29일. 그 날은 새벽 우유 배달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미 여러 학교가 방학에 들어갔기에 배달 해야하는 학교 수가 몇 학교 없었고, 학교 한 곳 배달만 하면 되는 나는 원래 사장님 구역인 학교를 같이 하기로 되어있어 막 그 학교 배달을 마친 참이었다. 아무래도 마지막 날인 만큼 밥이라도 한 끼 먹이고 보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새벽 5시를 갓 넘긴 그 시간에 연 가게라곤 24시간 영업하는 깁밥*국 분식집뿐. 사장님은 이미 라면 한 그릇과 참치 김밥을 시켜서 드시고 계셨다. 내가 맞은 편에 앉자마자 똑같이 라면과 참치 김밥이 나왔다. 사장님과 나는 긴 대화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고보니 3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작은 사장님과는 처음으로 갖는 식사 자리였다. 매번 직원들의 사기를 돋기 위한 회식자리는 큰 사장님이 주도하시고 그 자리에 작은 사장님은 계시지 않았다. 유제품 회사 여러 곳과 전북권 내의 학교 측 사이에서 어떻게보면 두 쪽의 비위를 맞춰야하는게 여간 쉬운게 아니라고 운을 띄우시는 사장님. 남의 밑에서 남의 돈을 받고 일하는게 훨씬 편한거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신다. 창업이나 사업은 어렵다고. 역시 그렇겠죠.. 그 이상의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으시는 사장님. 라면 먹는 시간이 뭐 얼마나 걸리던가. 뚝딱 해치우고, 마지막 우유배달 일정을 마치기 위해 그곳을 빠져 나왔다.
하늘님은 용케도 내 마지막 우유배달 날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12월 한 달간 조금도 눈송이를 흩뿌리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내 우유배달 무사 마무리를 축하라도 하시는듯, 우유배달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전주의 첫 눈 다운 눈송이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쳇, 작년엔 눈 때문에 꽤나 고생한걸 다 지켜 보셨나보지? 측은했던게야?
그래, 우유배달 끝-난김에 그간 말 못한 우유배달 에피소드를 적어봐야겠다.
시동이 안걸려서 견인을 불러야 할 때도 있었고
1. 하늘에서 땅까지 심장이 아찔한 진자운동을 하게 만드는 어둠 속 파수꾼들.
상상해보라. 시간은 새벽 5시. 칠흙같이 어두컴컴한 학교 복도를 걷고 있다고. 상상만 해도 절로 오금이 저린 그곳을 난 매일같이 다녔다. 각 반에 초록 우유상자를 넣어줘야 일이 마무리 되었기 때문이다. 하필 학교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는 천지에 널려있었고, 난 내가 이 시간에 매일같이 학교에 있을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벌써 3년째 이 일을 하고있지만 이 부분은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저 빨리 배달을 마치고 빠져나가자는 마음 뿐. 여전히 어떤 물건은 사람 형상을 하는듯 보이고, 갑자기 들리는 작은 소음에도 심장이 촬깃해졌다.
하지만 정말 내 심장을 추운 겨울 핫팩 주무르듯 주물러대는것은 따로 있었다.
중간보스급의 그것은 다름아닌 핸드폰의 알람! 아니, 진짜 궁금하고 억울해서 그런데요. 왜 핸드폰을 학교에 놓고 다니시냐고요 학생님들아. 그럼 알람을 맞추지 마시던가.. 왜 괜히 솥뚜껑보고 놀라게 만드는지 내가 진짜.. 눈물이..ㅠ 고요해야하는 복도를 달리고있는데 갑자기 울리는 알람소리는 엄청난 심장타격이다. 까무러치지 않는게 다행이라니까. 경험 안해본 사람은 진짜 모릅니다.
그리고..날 정말 까무러치게까지 하는 최종보스는 바로... 광고용 전단지 및 노트를 뿌리는 아줌마 아저씨들. 이분들로 말씀드릴것같으면 거의 여고괴담 귀신급이다. 학교 교문이 열리는 시간과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 그 사이에 출몰하여 각 반에 들어가 광고물을 책상에 하나하나 뿌리고 헐레벌떡 사라지신다. 캄캄한 교실 문을 열고 우유박스를 넣고있는데 갑작스러운 어둠속에 움직이는 무언가. 으악!!!! 조용하면서 재빠른 움직임. 너무 무섭다 진짜. 말그대로 귀신이다. 움직임도 어찌나 빠른지 허공답보 수준. 알바로 뛰시는듯한데 이분들이 이렇게 급하신데는 물론 학교 여러곳을 돌아야하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학교 주사님들(경비 서시는 분들)의 눈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지만 이러한 광고는 합법이 아닌듯 하고 학교 측에서 골머리를 썩히게 하는 부분인것 같다. 유추해보건데 주사님들이 학교 측에 이 부분 관리로 꽤나 혼나시는게 아닐까싶다. 이런 아줌씨들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시는 몇몇 주사님을 본 적이 있다. 우유 배달의 임무만 있는 나는 이분들을 제지할 권리도 뭣도 없기에 그저 크게 놀라고 가슴을 쓸어내릴 뿐. 정말 한번씩 그러면 수명이 몇 년씩 감소하는 느낌이다..벌자고 하시는 일이시겠지만ㅠ 내 입장에선 후..
뒷바퀴가 아작나기도 했다.
2. 그 시간의 내 유일한 친구 라디오DJ.
차량 운전동안 심심해서 한동안은 카팩을 이용한 노래를 많이 들었었다. 1년쯤 그러다보니 슬슬 지겨운 느낌. 우연히 라디오를 틀었다가 이제는 매일같이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내용과 남들 사는 얘기, 재미와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시절 노래. 특히 군시절 버스운전 하면서 듣던 라디오 추억이 새록새록 나서 더욱 라디오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요즘 자주듣는 채널은 SBS에서 일하는 시간대에 하는 '조정식의 펀펀투데이'와 '김영철의 파워FM' 정도였다. 노래도 같이 따라부르고, 퀴즈 응모도 여러번 했다.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 시간에 이걸듣나 싶기도 했다. 한 번은 문자 사연도 보냈었다. 딱히 내용이 있는건 아니고 우유배달 하면서 잘 듣고있는 대학생이라는 정도로. 문자가 읽히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읽히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이런 흔한 내용으로 읽힐리가..
그런데, 무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배달 중에. 학교로 들어가기위해 차 문을 열려는 찰라. 어디서 많이 아는 내용이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보냈던 내 문자가 조정식DJ의 입으로 읽히고 있던 것이다. 오오- 신기해. 내께 읽혔어 오오오- 애처럼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이런 기분이구만.. 덕분에 버킷리스트 10번 '라디오 사연 읽히기' 항목을 달성했다. 놀랍고 신기할따름이었다. 그 새벽에 친구들 단톡방에 자랑자랑. 물론 리액션해줄 친구들은 꿈나라였지만. 조정식DJ는 새벽에 우유배달하러 가기전에 나이트 갔다가 가는거아니냐는 농담으로 멘트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군요..
수거해서 나온 우유는 내꺼.
3. 여보시오- 문을 여시오-
가끔 친구를 데리고 우유 배달을 가곤했다. 같이 일을 도와주는 대신에 그날 수거해서 먹을 수 있는 우유들을 한 보따리씩 친구에게 줬었다. 일도 편해지고 말동무도 생겨서 은근 반겼다. 그날도 옆에 친구를 태우고 우유 배달을 하고 있었다. 두번째 학교 배달을 마치고 세번째 학교로 향하고 있는데 멀리 저 앞에 왠 사람이 도로 한 가운데에 한자 大자로 서서 팔을 벌리고 있는게 아닌가. 새벽 시간인만큼 도로에 다니는 차는 내껏 뿐이었고, 가로등이 있어 어둡진 않았지만 꽤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그런 광경을 보니 순간 엄~~~청 쫄았다. "뭐, 뭐야 저거!"
옆으로 빠질 길은 없고, 천천히 그쪽으로 차를 몰아 접근했다. 가까이가서 보니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이었는데,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차가 가까이 접근할때까지 길을 막고 서있다가 무슨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더니 차 옆으로 다가왔다. 음.. 여자..고 이 시간에.. 울고서 차를 막고 있다..라 어디서 범죄스릴러 드라마, 영화는 많이봐서는. 갑자기 느껴지는 범죄 스멜. 아, 위험에 처해있구나! 무얼 피해 도망쳐나온건가? 도움이 필요한듯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쫄아있는건 친구나 나나 매한가지.
"무슨일이세요? 뭐, 위험한거에요?"
"아저씨..훌쩍. 저 좀 살려주세요..흐앙.."
엥? 살려달라고? 진짜 그런거야? 그..그거 맞아? 범죄의 피해자? 실컷 더 쫄아서는 무슨 일인데요?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풍겨오는 찐-한 술냄새. 엥?
"저좀 저쪽 신시가지 **까지 태워주시면 안되요? 제발요ㅠ"
"무슨 일 있으신거에요?"
끝까지 무슨 일인지는 얘기 않는다. 무턱대고 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친구와 내가 타있는 트럭은 만원상태였다.
"무슨 일이신데 그래요? 설명해주셔야 태워드리죠. 경찰엔 전화해보셨어요?"
"바로 뒤에 경찰서 있는데...가봤는데...경찰 아저씨들이 돌려보냈어요ㅠ 저좀 태워주시면 안되요? 거기까지 꼭 가야해요"
"그니까 무슨 일이시냐구요"
"...태워주세요"
"택시비 없어요?"
"..."
그러고보니 바로 뒤에 50M도 안가서 경찰서가 있다는게 기억났다. 경찰 아저씨들이 돌려보냈다고? 술냄새에...흠..
판단컨데 그저 술에 만취한 취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술에 떡이 되서는 이런 고약한 술버릇이 있는 것이 아닐까? 들어보니 이미 여러차례 히치하이킹을 시도한듯. 어휴 무서웠네. 뭔일 있는 줄 알고. 곱게 먹고 곱게 들어가시지 이 시간에 도로 한복판에서 뭐하시는 건지..경찰 아저씨들이 돌려 보냈다면 말 다했다. 다시 경찰서에 가보는게 좋겠다고 말하고는 차를 다시 몰아 그곳을 빠져나가는데 트럭 옆구리를 쾅 하고 주먹으로 친다. 얼씨구. 미안하지만 취객 태워주는 택시가 아니라서요. 멀리서 빽미러로 힐긋 보니 왠 다른 여자 하나가 우는 그 여성에게 접근하고 있다. 아무래도 일행같다. 대체 이게 뭔일인지. 과연 내일 아침 아니 해가 져서는 깨어나서 전날밤의 일을 기억이나 할까 저 여자. 내가 너무 냉정했나? 요즘 하도 세상이 흉흉해서 도움도 쉽게 못주는 세상이 됐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꺼림칙한건 여전하다. 아냐, 만취한건 확실했잖아? 혹시 내가 위험했던걸까? 그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범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듯 하다. 어쨌든 그 도로에서의 사건이 이후 며칠 사이에 보도된것도 아니고. 괜히 기분만 언짢아졌던 사건이었다. 막상 그런 일에 처하면 참 당황스럽구나..
생각해보면 참 별에별일이 다 있었다. 이번 해에도 큰 사고 없이 우유 배달일을 마무리 할 수 있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끝으로, 3년넘게 꼬박꼬박 새벽에 일어난 스스로가 대단하다고도 생각도 들고 알게모르게 여러 경험 했다는 생각도 든다. 유제품이라면 이제 치가 떨리지만 내 대학생활을 온전히 유지시켜준 참 괜찮았던 알바였다. 당분간은 맘껏 늦잠잘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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