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쌀벌레



쌀벌레가 생겼다.


평소와 같이 밥을 짓기 위해 매번 쌀을 보관해두던 플라스틱 용기에 표주박으로 한 움큼 쌀을 퍼올렸는데 두어 개의 검정쌀이 자리 이동을 감행한다. 쌀벌레 녀석들이다. 2년을 넘게 이곳 원룸에 살면서 매번 부모님이 가져다주신 고창 쌀로 밥을 해 먹어왔다. 여태까지 주신 쌀 속에서 쌀벌레와의 조우는 전무했기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녀석들이 먹다 남긴걸 먹어왔다는 생각이 들어 이 뜻밖의 쌀 라이벌놈들이 상당히 분하고 못마땅하다. 좁쌀만 한 쌀벌레들은 플라스틱 용기 벽을 타고 팔자 좋았던 그들만의 아방궁을 탈출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쌀벌레라는 녀석을 처음 본건 어릴 적 아직 만화영화를 즐겨 보던 때로 기억한다. 익산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는 언제 한번 신문지를 방구석 한 쪽 바닥에 까시고는 쌀들을 부어 엷게 펼쳐 놓으셨다. 그리고는 쌀들을 유심히 살펴보시다가 당신의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무언가를 골라내셨었다. 호기심이 일었던 나는 그렇게 외할머니 옆에서 쌀벌레를 처음 보았다. 지금도 벌레에 대한 공포가 별로 없긴 하지만 그 당시엔 곤충 채집에 광적으로 희열을 느끼던 나는 마치 장수풍뎅이 극 축소판 같은 모양을 한 쌀벌레가 조금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었다. 허나, 돈 말고는(아니, 어쩌면 돈이라도) 그 어떤 것도 희소성 적은 것은 쉽게 흥미가 떨어지는 게 인지상정. 박 터지게 기어 나오는 쌀벌레 역시 오래 내 흥미를 끌 수 없었다.


 싱크대에 쌀 용기를 올려놓고는 한참 쌀벌레를 잡아댔다. 미리 잡곡과 검정쌀을 섞어 놓은 터라 육안으로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잡아내고 잡아내도 쌀을 한번 휙 휘저으면 두세 군데에서 작은 아장거림이 느껴지기에 결국 두 손 다 들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봐도 딱히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특단의 조치. 아깝긴 하지만 버리기로 한다. 그날 저녁. 룸메 S와 함께 S의 본가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어머님께서 해주신 갈치조림과 조개탕을 맛있게 먹으며 쌀벌레 얘기가 화젯거리가 됐다. 우리의 조치를 들으신 어머님은 '아이고!'를 연발하시며 그 아까운 쌀을 왜 버리냐며 본인께서 잘 걸러내 떡을 만들 것이니 달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참 감사하게도 페트병 몇 개에 새 쌀을 넣어 주셨다. 페트병에 분할 보관하면 쌀벌레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는 팁과 쌀벌레가 성충이 되면 나방이 된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며칠간 비가 계속되고 마침내 비가 그쳐 햇빛이 따가워졌을때. 조용히 돗자리와 쌀 용기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 외할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쌀을 엷게 펼쳐 놓았다. S의 어머님의 쌀을 잘 펴놓기만 해도 쌀벌레들이 알아서 기어 나간다는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하루 정도 있다가 다시 긁어모은 쌀들은 아마도 지금 S의 집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안그래도 욕심 많은 나인데, 더이상의 간접 키스는 용납 못한다.



일상다반사/일상 다른 글